경마장 가는 길


극장에 홀로 간 적은 많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영화를 보는 일은, 지레 해 보지도 않고 겁을 먹는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는 것과는 다르다. 하지만 음습한 비디오방에서 중앙에 형성된 일그러짐의 수평선이 내내 지글거리는 영화를 홀로 보는 일은 우려 이상이었다. 때가 껴 끈적해진 인조가죽 재질의 낡은 소파는 화면에서 튀어나온 것이라 여겨도 좋을법했다. 그 소파는 무척 심기 불편했다. 소파는 다방의자가 되기도 했고, 식당의 의자가 되기도 했으며, 여관방의 침대가 되기도 했다. 때때론 르망의 조수석이 되어 나는 J의 짜증을 온몸으로 받아들어야만 했다. 나는 갈등이 해소되는 장소로써의 경마장이 어서 등장 해 주기를 갈망했다. 이제 어디로 가지요? 하는 J의 질문에. 남산 말고 경마장이란 말이다. 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그토록 기다려왔던 경마장은 끝내 등장하지 않았다. 결국 R은 배신당하고 소외받았다. 영화는 이대로 끝이 나는 줄 알았다. 꾸준히 지글거리던 영상 덕에, 이따금 R이 수첩에 적던 무언가가 경마장과 관련된 것이었음과, 그 문장이 경마장 가는 길 이었음은 영화가 끝나는 순간에 다다라서야 알 수 있었다. 그는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이야기를 만들고 있었다.

소설은 영화가 따로 시나리오를 필요로 하지 않아도 되었을 법 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치밀했다. 문장들은 장면을 그려내고 있었고, 영화에서 본 장면 장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문장 하나하나가 끈적한 소파의 감촉을 상기시켜주었고, 책을 읽는 내내 함께 했다. 그리고는 곧 J의 입에서 끊어질 줄 모르고 흘러나오던 이야기들이, 비디오방의 음습한 기운과 냉방으로 얻은 감기기운을 긁어대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시점의 나는 감기를 앓는 상태다) 하지만 영화에서 보았는지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기 어려운 R의 이야기들을 읽으며 확실해 진 것은, 작품 속에서 만들어지는 이야기들이 본 작품으로 다시 환원되어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작가에 의해 만들어진 이야기 속의 R이 이야기 밖의 작가를 이야기 하며, 이야기 밖의 작가는 영화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의 치밀한 표현을 통해 이야기 속 R을 이야기로부터 현실로 분리시킨다. R은 작가에 의해 만들어졌음과 동시에 R은 이야기 밖의 작가를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여 이야기를 현실화 한다.

영화는 이 작품이 다루는 이야기의 현실화를 가장 효과적으로 이루어 줄 수 있는 수단이 아닐까. 때문에 영화 ‘경마장 가는 길‘은 소설의 연장선에 있는 소설적인 영화이며, 소설 ’경마장 가는 길‘은 지극히 영화적인 소설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더불어 한 가지 재미있는 의문은, 작품에서 이루어지는 환원이 소설과 영화라는 다른 형식의 작품들 사이에서 마찬가지로 이루어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점이다. 우선은 감기부터 낫고 생각 해 봐야겠다.

2006/09/22 11:25 2006/09/22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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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라윤 2006/09/23 20: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따 글 잘썼네~

  2. shiver 2006/09/25 22: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쓰긴 -.-